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의 전투의 하나로 금산을 점거한 고바야카와(小早川廿景)의 왜군은 험한 웅치를 넘어 전주방면으로 진격하려 하였다. 이에 나주판관 이복남(李福男), 의병장 황박(黃璞), 김제군수 정담(鄭湛), 남해현감 변응정(抩應井) 등은 군대를 연합하여 함한 지형을 이용하여 왜군의 침입을 막았다. 그러나 우세한 대대적인 왜군의 재차 공세를 받아 우리 군대는 결사적으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이복남은 퇴각하고, 정담과 변응정은 화살이 다 떨어질 때까지 용전하여 적병 수백명을 죽였으나, 마침내 포위되어 모두 죽었다.
전주를 보수(保守)함에 있어 이들의 공이 실로 크다고 하겠다. 싸움이 끝나자 왜군은 우리 군사의 시체를 몰아 길가에 묻고 표목(標木)에 조조선국충간의담(弔朝鮮國忠肝義膽)이라 써놓고 금산으로 퇴각하였다.
◆ 정담(鄭湛) ? ~ 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무신·의병. 본관은 영덕(盈德). 자는 언결(彦潔). 창국(昌國)의 아들이다. 1583년(선조 16)에 무과에 급제해 이탕개(尼湯介)의 변에 공을 세우고, 여러 벼슬을 거쳐 1592년에 김제군수로 나갔다. 이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해 권율(權慄)의 지휘하에 나주판관 이복남(李福男), 해남현감 변응정(邊應井), 의병장 황박(黃樸) 등과 함께 웅치(熊峙)를 방어했다. 이때 금산을 거쳐 전주를 점령하려는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 휘하의 일본군을 7월 7·8일 양일간에 걸쳐 웅치에서 백병전을 벌이면서 끝까지 방어해 그들의 진격을 막고, 모두 전사했다. 일본군은 그 충절에 경의를 표시해 ƒ조조선국충의간담(弔朝鮮國忠義肝膽)„이라는 묘비를 세웠다. 1690년(숙종 16)에 정문이 세워졌고, 뒤에 병조참판에 증직되었으며, 영해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